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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순례자(巡禮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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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18  10: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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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우리나라 최대의 젓갈 시장으로 유명한 강경포구에는 옥녀봉이라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다.

비록 작은 동산이기는 하나 강경에는 높은 산이 없다보니, 이곳에 올라보면 강경읍내는 물론, 아름다운 금강과 더 없이 넓은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논산의 8경중 하나라고 한다.

또한 유적지가 많기로 유명한 이 옥녀봉의 전설(傳說)에 의하면, 산 아래 흐르는 금강 물은 맑고 고와서 달 밝은 보름날이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목욕을 하러 왔다고 한다.

이때에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도 어렵사리 허락을 받고 내려왔다. 그녀는 이곳의 별천지 같은 절경에 심취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조차 잊고 있다가 올라오라는 세 번의 나팔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가다가, 한쪽 가슴을 내보인 채 하늘나라로 급히 올라가게 되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딸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옥황상제는 영원히 그 땅에서 살도록 떨어뜨리라는 명을 내린다.
그 이후 그녀는 매일 산위에 올라가 잘못을 뉘우치고 천상에 올라가기를 애원했으나 끝내 하늘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해 이곳을 옥녀봉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연 많은 옥녀봉에는 침례교단 전국 총회에서 사적지로 지정해 놓은 ‘ㄱ’자형의 교회 터와 향토유적 제38호인 초가집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국내 최초의 예배지라고 한다.

즉, 조선 말기에 미국 보스턴의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폴링 선교사 부부가, 그 당시 인천에서 강경까지 배를 타고 다니며 포목장사를 하던 지병석씨를 전도하게 되었고, 그리고 1896년 2월 9일 지병석씨 집에서 선교사 부부를 비롯한 다섯 명이 첫 주일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한국 침례교단으로서는 최초의 교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강경 침례교회에서는 폴링 선교사(1896~1899년) 3년, 그리고 스테드만 선교사(1900~1901년)가 2년 밖에 안 되는 사역을 하였다고는 하나, 이 땅에서 만큼은 최초라는 큰 의미가 있고, 기버(Giver)의 삶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그분들의 발자취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많은 순례자(巡禮者)들이 다녀간다는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캐나다의 말콤 펜윅 선교사가 1901년에 제3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된다.
그는 186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아버지 농장에서 종사하다가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게 된다.

그는 1883년 외국 선교를 위한 ‘나이아가라사경회’에 참석했다가 “너는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주님 저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더욱이 신학교에는 가보지도 못한 평신도입니다.”라고 변명을 하다가, 4일간의 기도 후에 드디어 순종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즉, 더럽고 쭈그러진 양철통이라도 여기에 생명수를 담아서 전해주리라고 작심하며, 황해도 소래를 찾은 것은 1890년이었다.

펜윅은 조선 땅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여 1893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함경남도 원산지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곳에서 찬송가 563장(‘예수 사랑하심을’)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불렀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는 개성의 호스돈 여학교에서 사역하고 있던 감리교회 선교사인 하인즈 양과 1900년에 결혼하고, 원산에서 과수원을 하면서, 남녀 성경반을 조직해 목회를 하다가 강경 침례교회 담임과 침례교단 총회장으로서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1936년에는 무려 250여개나 됐다고 한다.

특히 펜윅 선교사는 1906년에 최초로 침례교단 31개의 교회를 모아 전국 총회를 이 강경침례교회에서 열었는데 그때 개설한 성경학교가 현재 대전에 있는 침례신학대학교라는 것이다.

지리(地理) 또는 역사적으로 보면 이곳 강경은 경술국치의 해(1910년)에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제의 곡물수탈을 위한 거점이 되었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강경에는 왜놈들이 상당수 거주하게 되었고 근대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 만세시위 현장이었던 옥녀봉에 신사(神社)를 짓는 다는 명분으로 이 강경침례교회를 탄압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전치규 목사님을 비롯한 32명의 교인들은 원산 헌병대로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그들은 일본 헌병들의 잔인(殘忍)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감수(甘受)하면서 옥에서 순교 또는, 불구의 몸으로 신앙을 지켜왔다고 한다.

그놈들의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회의 건물이란 건물은 흔적도 없이 불태우고 성도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 자리에 신사(神社)를 버젓이 세웠다고 한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 말살정책과 항일사상 근거지를 없애려는 의도로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곳 강경에서는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했다고 한다. 이 옥녀봉의 반대편 입구에는 등록문화 제42호인 성결교단의 성지(聖地)를 볼 수 있다. 이 강경성결교회의 주일학교 60여명의 학생들은 김복희 교사의 인솔 하에 집단으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였다.

이 일로 강경에 있는 학생들은 왜놈들의 총칼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성들이 나라 잃은 슬픔에 울분을 토하였고, 우리들 스스로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또한 6.25 동란 때에는 이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안으로 포탄이 떨어졌지만 다행히 터지지 않았다고 한다.
즉, 그 포탄이 순간적으로 불발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적 같은 실화가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는데 그곳 역시 성지순례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1919년의 3월에는 장날마다 독립만세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는데 당시의 상황을 이 공원에 있는 ‘항일운동 기념비’를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동토(凍土)의 나라! 이 땅에서 기버(Giver)의 삶을 살다 가신 폴링, 스테드만, 펜윅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의 ‘아르케고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우리에게 조건 없이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12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에서도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잘 이어 가고 있는 기버(Giver)들이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이 성지에 봉헌한 박석(薄石)에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데, 조치원 제일 침례교회(담임: 박수진 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선한 목자께서 테이커(Taker)와 매처(Matcher)가 아닌 기버(Giver)로 살라고 당부하시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니겠는가!
순례자(巡禮者)들이여 영원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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