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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일사각오(一死覺悟)’
세종매일  |  ygnew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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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29  09: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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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칼날이 나를 기다리는 한 그 칼날을 향하여 나아 가리이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 내 앞에서는 오직 일사각오(一死覺悟)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을 남긴 주기철 목사는 독립 운동가이자, 한국기독교의 상징적인 인물인 동시에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이기도 하다.

그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에서 주현성 장로와 조재선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13살 때 한일합병(1910년 8월 20일)으로 나라를 잃는 슬픔을 겪기도 한다. 그해 성탄절에 처음 교회를 나가며 그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1913년 주기철은 고향을 떠나 멀리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유년시절부터 싹텄던 신앙 위에 애국사상과 민족의식을 키워준 두 분의 큰 스승을 만나게 된다.

민족주의자 남강 이승훈과 고당 조만식이었다.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신앙과 품행이 좋다는 평가와 아울러 수석이라는 영예(榮譽)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이곳에서 맺어진 조만식과의 인연은 평생을 두고 이어진 운명적 만남이었다.

그들은 주기철이 일제 강점기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그에게 거는 기대는 특별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는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신앙의 길로 들어섬과 동시에 교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스스로 갖게 된다.

이 당시 스승 조만식은 조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우리 물산 장려 운동’을 전개하고 다녔는데 즉,‘우리가 지은 것을 먹자, 입자, 쓰자. 그리고 우리 땅을 꽉 쥐고 절대 놓지 말자.’며 울분을 토해 내듯이, 강연을 하고 다니며 민족의식을 불어 넣었다.

또한 이 강연에 앞서 경건의 예배를 꼭 드리곤 했는데 이 예배를 인도한 사람이 바로 주기철 학생이었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주기철은 목사 안수를 받으며 목회자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가 목사안수를 받던 바로 그해 서울 남산에는 5년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세워졌다. 조선총독부가 일제 총칼의 상징이라면 이 거대한 조선 신궁은 정신적 상징이었던 것이다.

황국신민화 정책이 본격화되고 조선인들에게는 총칼을 앞세워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죽도록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초에는 부산의 달동네인 초량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세계적인 공황과 일제의 잔혹행위가 극(極)에 달했던 그때 백성들의 삶은 더욱 가파르고 고단 해저만 갔다.

거리에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주기철 목사는 교회 앞마당에 임시 가설소를 만들어 굶주린 어린아이들을 모아 하루에 많게는 500여 명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그 비용도, 사모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지고 온 논 6천평을 팔아 가면서 구제(救濟)에 온 힘을 쏟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듯이, 그는 늘 기도 하기를 “주님이시여! 당신은 사람들이 다 외면하던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고 걸인과 나환자의 벗이 되셨나이다. 존귀하신 당신이 그토록 낮아지셨으니 비천한 저는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겠습니까?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으니 저는 나환자의 발을 핥게하여 주옵소서! 모든 사람의 발 앞에 짓밟히는 먼지와 티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듯 그의 삶은 오로지 헌신(獻身)과 희생(犧牲)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어린이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일만이 아니라, 이들이 어떻게 자라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교회 내에 최초로 독자적이고 선구적인 방법으로 ‘삼일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2년 부산에서 마산 문창교회로 자리를 옮긴 그는 틈만 나면 무학산 십자바위에 올라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눈물 뿌려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1936년 주기철 목사는 돌연 평양 산정현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는다. 마산에서 날로 목회가 부흥되고 있는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지의 땅으로 가야 하는 것은 결코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족의 시련 앞에서 신사참배의 거센 풍랑을 막아 내기 위해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평양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은 한국기독교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제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신앙과 민족정신의 보루(堡壘)였던 이곳 산정현 교회를 지켜내는 일이 자신이 해야 할 사명(使命)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가 평양에 온지 며칠 후 조선총독으로 ‘미나미 지로’가 부임하더니 총독령을 통해 신사(神社) 설치를 강요하고, 황국신민화를 위한 종합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이때 주기철 목사는 처음으로 산정현교회 강단에서 설교하기를 “최근 총독부에서는 국가 의식이라는 명분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는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절대로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담임목사인 제가 지겠습니다.”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양 형무소’에 끌려가 순교할 때까지 다섯 차례나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곤 했다.

총 5년 4개월이 수감되는 동안에 일본 놈들의 잔인하기만 한 고문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나라에는 충절의 의(義)가 있고, 부부에게는 정조(貞操)의 의가 있으며, 신앙에는 순결(純潔)과 신념의 의(義)가 있다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결국! 손과 발톱은 물론, 피부는 다 뭉그러지고, 두 눈은 멀었으며, 머리와 이빨이 다 빠져버린 채 주검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 끔직한 죽음을 앞두고서도 그는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죽을 때 살아 있을 수 없어서, 그렇게 외롭고, 험난한, 순교자의 길을 갔던 것이다.

그는 1944년 4월 20일 순교하여 평양의 문돌산에 잠들었지만, 후세의 우리들에게 ‘일사각오’라는 거룩한 유산(遺産)을 물려주었던 것이다.

얼마 전 진리와 성결의 요람(搖籃)에서 5년 동안 동역하던 령(靈)의 아들을 김천으로 보내며 “죽으러 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주기철 목사가 물려준 ‘일사각오’를 일컫는 말이 아닐까!

이를 지켜보는자 마다 어느새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언제부터 인가 이 나라에는 ‘일사각오’의 신앙(信仰)이 사라져 안타깝다는 탄식(歎息)의 소리가 높기만 하다.

아 !‘일사각오’의 정신이 이 나라 각계각층에 다시 부활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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