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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장부가(丈夫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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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2.25  17: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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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장부(丈夫)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천하를 크게 바라봄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 것인가!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개함이 한번 뻗치니 반듯이 목적을 이루리로다.
도적 쥐새끼 이등(이토 히로부미)이여, 그 목숨 어찌 인간이란 말인가! 이를 으를 줄 알았으니 도망갈 곳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동포여! 동포여! 어서 빨리 큰일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만세 대한동포여!

이글은 안중근 의사(義士)가 쓴 장부가(丈夫歌)이다.

그의 소원대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여 1962년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하다. 그는 자랑스럽게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차례 등장하는 민족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는 1879년 9월 2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안태원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봉산 인근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그는 자라면서 활쏘기와 사격술을 익히고 일찍부터 서양문화와 학문을 받아드린 독실한 천주교 신자(信者)였다.

이를 통하여 교육에 눈을 뜬 그는 진남포에서 사재를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운다. 이 나라의 독립은 교육이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04년 러일 전쟁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강제 징용과 수탈(收奪) 그리고 양민학살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합법적인 구국운동의 한계를 느낀 그는 해외로 망명해 무장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서울과 부산을 거처 원산에서 연해주로 밀행을 계획했지만 일본경찰에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직접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를 거처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다.

우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 위해 단지회(斷指會)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단지동맹을 맺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거사(擧事)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철도 부설권 문제와 한반도 병합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쵸프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들은 하얼빈 역에 은밀히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 0분경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탕! 탕! 탕! 모두 복부에 명중시켜 이토 히로부미의 숨통을 순식간에 끊어놓았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치고 러시아의 헌병에게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으로 인계되었다고 한다.

곧이어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온갖 고문과 고초를 당하면서도 자서전(自敍傳)인 ‘안응칠역사’(안중근역사)와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특히 그는 재판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조목조목 해명하는 의연(毅然)함을 보이자 왜놈들은 오히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정미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군대를 해산 시킨 죄 △무고한 사람을 학살한 죄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한국인은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제일은행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한국이 300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값 이다.

이렇듯, 그는 평소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목숨을 구걸하거나 구차한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는 사형(死刑)을, 함께했던 우덕순은 3년 형(刑), 그리고 조도선과 유동하는 1년 6개월 형을 선고(宣告) 받았다.

선고 이후 안중근 어머니께서 수감되어 있는 아들에게 보낸 짧은 편지는 백성들의 공분(公憤)을 불러오고도 남았을 것이다.

“옳은 일하고 받은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살아서 너와 상봉하기를 기망하지 않노라. 네가 만약에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망설이지 말고 죽어라” 하시던 그 어머니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래서 “왕대밭에 왕대난다”는 말이 생겨났나보다! 아! 그는 선고(宣告)후 40여일이 지난 1910년 3월 26일 순국선열이 되고 말았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남긴 유언(遺言)이 110년이 지난 지금도 이뤄지지 않고 있어 씁쓸하기만 하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깊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렇듯 그는 사나 죽으나 오직 나라와 국민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고귀한 뜻은 날이 갈수록 사라져만 가고 있어 안타깝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요즘, 그의 선고일(2월 14일)이 단순히 초코렛을 주고받는 날로 알려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 일본 놈들의 꼼수에 의한 발렌타인 데이(Valentine Day)만 요란 한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된다.

그렇다. 그의 순국일 110주년(2020년 3월 26일)을 코앞에 두고서도 아직까지 그가 남긴 유언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들이 부끄럽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일까! 혹자(或者)는 말한다.

요즘은 각계각층의 봉황이라는 자(者)들이 과거를 부정하다 못해 자기들 입맛에 맞춰 쥐락펴락하다보니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의 숭고한 정신이 변질되어 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아무튼 그분들의 유언(遺言)과 유지(維持)을 잘 받드는 것 또한 애국이라는 것이다. 그 꿈이 속히 이뤄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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