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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3.1운동과 교회(敎會)’
세종매일  |  ygnew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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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08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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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그는 성결교단의 큰 목회자이다.

그의 저서(著書)인‘말씀과 함께하는 삶’2020년 3월호에, 1919년에 있었던 3.1 운동은 선교사. 목회자. 교회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글을 실었다.

구한말이던 1905년 11월 9일이다.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려고 했던 일본(日本)은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로 보낸다. 그는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수단(手段)이었다.

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대신들에게 결정권을 위임(委任)한다. 대신(大臣)들도 5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에서 결론을 내지 못한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위협과 공갈을 자행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大臣)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조약체결에 대한 가부를 물으며 조약을 승인하라고 압박한다. 이때 8명의 대신 중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하는데 이후, 이들을‘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이 조약에 따라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관도 전부 문을 닫게 된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에서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주권을 일본에 내주었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통분(痛憤)하며 덕수궁 앞의 대한문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손에 도끼를 들고 꿇어 엎드려 상소(上疏)를 하고 있었다. 역적들의 목을 치든 자신들의 목을 치라는 것이었다. 이를‘도끼 상소’라고 하는데, 이 상소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상동감리교회 청·장년들이었다고 한다. 이 교회는 스크랜턴 선교사가 1901년 세운 교회다.

당시 상동감리교회 목회자는 전덕기 목사였는데, 그는 극빈자를 돌보고, 독립운동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그가 돌아가셨을 때, 상여를 따르는 사람들이 십리 길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이들은 거지, 불한당, 기생, 백정들이었다고 한다.

최남선은 변절하기 전(前)에“나의 독립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전덕기 목사였다”라는 진술을 하였고, 이러한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아 3.1운동 후, 조선총독부는 상동교회가 조선 독립운동의 근원지(根源地)라는 보고서를 작성 였다고 한다.

전덕기 목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후, 일제에 검거돼 모진 고문을 받은, 그 후유증으로 1914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국회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이때 14가지 중 하나가 민족자결주의이다. 이는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치하에 있었던 약소(弱小)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때부터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도 독립이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갑자기 고종황제가 승하(昇遐)하신다. 그리고 고종황제가 일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에 사람들은 3월3일 고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에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앞두고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미년(己未年) 3.1 운동이다. 또한 1919년은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34년 되는 해였다.

그동안 기독교는 한국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고, 노예, 백정과 같은 소외 계층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는 이 나라 살리는 운동을 해 왔던 것이다.

반면 기독교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일본의 침략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을 식민지화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기독교는 3.1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날 당시에 우리나라 인구는 약 1,600만 명이었는데, 그중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5%에 해당하는 24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3.1 운동의 중요한 시발점이었던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3.1 운동이 4월말까지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에 교회와 기독학교는 주요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어느 교단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신한청년당’을 창당한다.

그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는 윌슨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대한민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만방에 선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때 대표로 보낼 적임자가 김규식이었던 것이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911년의‘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상하이로 망명해 살고 있었다.

그렇게 파리에 대표로 참석하게 된 김규식은 동지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 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虐政)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통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내가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이 말이 3.1 운동을 일으키는 시원적(始原的)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3.1 운동이 일어나고 난 후에, 일본 놈들의 기독교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즉, 일본군들은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죽이는 만행을 여기저기에서 저지르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가옥들을 불태우기도 하고 교인들을 모아 놓고 총살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 운동에 약 200만 명이 참가해,  사망 7,509명, 부상 15,850명 그리고 45,306명이 체포됐다고 한다.

 3.1 운동 후부터, 외래 종교로 비하(卑下)되었던 한국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

즉, 예수 믿으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종교로 자리 잡아 오고 있었다. 그렇다. 금년은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1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 찬란한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들이 지금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구한 말 선교사들과 믿음의 선배 목회자들이 쌓아 놓은 신앙을 본받기는커녕, 개교회 성장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 사회를 정화시켜야 하는 교회가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아서야 되겠느냐는 진솔한 고백에서 그는, 큰 목회자(牧會者)다운 내공(內攻)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3.1 운동 당시 교회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것처럼, 건강한 나라, 정의로운 나라, 행복한 나라가 되도록 힘쓰자고 권면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국가관이 필요한 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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