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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소설가 김재찬윤동주 시의 세계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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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13  10: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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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재찬.

윤동주의 시편들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남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 시기를 겪어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상징적인 고난의 아픔으로 부딪쳐 왔다.

그에게 바쳐진 수많은 글 속에서 그의 시는 이해되기보다는 훨씬 더 많이 저항으로 다가왔다. 그 중 하나는 사자에 대한 우리의 저미는 슬픔이 아닐까.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하고, 그의 삶과 시를 말하는 이들의 안타까움이었다. 그리하여, W·H·오든의 한 싯귀 처럼, “그는 그의 찬양자들이 되었고, 회고담 속의 전설적인 시인이 되었다.”

민족의 역사를 담아내는 글을 써야 한다. 우리 국가사회가 당면하는 문제를‘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글을 써왔다.

특히 나의 관심사인,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의 일단이었다. 나의 글 씀은 우리 민족사에 대한 나름의 헌정이었다. 그래서 근·현대사를 깊이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근·현대사는‘민낯 한국사’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사는 일반 민들이 알기에는 너무 모순된 왜곡의 진실처럼 과대 포장되어있다. 그래서 나는‘국민참역사’같은 한국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늘 가져왔다. 군부독재와 부패, 장기집권이 정당시 되었고, 반대자는 빨갱이, 종북으로 내 몰렸다. 친일 보수언론은 이들 독재 권력에 아부하여 구독부수를 늘리고, 정경유착은 부실기업을 낳았다.

1980년대의 치열한 민족·민주운동이 계화시대를 맞으면서‘참한국사’가 더 필요한 터였다. 동서고금, 인류의 위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집대성하고자 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한길, 인류 보편의 지혜와 사상을 우리 사회가 새롭게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동시에 민족시인 윤동주, 이상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던‘로마인 이야기 현상’에 대응하는 ‘참한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는 매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글을 쓰기 위해 서재로 건너갈 때는,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정장을 차려입는다는 그였기에, 장장 15년에 걸쳐 15권의 ‘로마인 이야기’를 써왔으리라. 그 사이 나이는 50대 중반에서 70세가 됐다.

그동안 여름휴가 한 번 안 갔다고 한다.‘로마인 이야기’완간 인터뷰에서“혹 나쁜 병이라도 발견되면 일을 중단해야 하고, 일단 중단하며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 병원에도 한 번 가지 않았다”고 고백해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가 로마에 몰두하며 구축한 작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정치 리더십’의 문제다. 단지 로마를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치를 잘못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서‘로마사’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시오노는 이 과정에서 인텔리들에게 정치를 비판하거나 경시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그는 마지막 권에서‘제행무상 성자필쇠(諸行無常 盛者必衰), 즉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고, 흥한 것은 언젠가 반드시 쇠한다는 말을 썼다.

결국 모든 것의 성공요소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운다.
 
나도 그와 같이 ‘참한국사’를 내가 감히 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오늘 우리 삶에 살아 있는 역사의 육성을 들려주는 저술가라야 한다!

어디에 귀속되지 않는‘자유로운 역사가’라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국의 명산을 찾아 떠났다.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지리산, 발길 닿는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국토, 우리 역사의 장엄을 새삼 확인했다.

천년만년 우리 겨레와 함께 숨 쉬면서 안식처가 되기는 했지만,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비극의 역사를 이 산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나라가 번성하는 데는 순서가 있다. 우선 경제력이 확보되어야 하고 다음은 정치 안정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문화가 꽃피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단계를 밟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운이 사회에 퍼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가 중요하고, 정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가장 손해를 보는 집단은 서민인 것이다. 일제 핍박이 그랬고, 6.25가 그러했다.

일제 치하 윤동주와 같은 시인을 대할 때 부딪치게 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저항성이 독자에게 무거운 정신적 충격을 준다는 사실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의 기독교 신앙이 두터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8살에 명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14살(1931년)에 졸업하였는데, 13살 때에 고종 사촌 송몽규와 함께 ‘새 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몇 호 내었고, 소년 잡지(三千里 등)를 구독하였다는 증언을 보면, 그의 문학적 관심과 저항은 이 시기부터 싹텄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에 평양 숭실중학에 재학 중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동주는 평양 숭실학교에서 일어난 신사참배에 참가했다. 신사참배 사건은 민족심과 기독교 신앙이 한꺼번에 짓밟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동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태초의 종말의 만남. 문익환, 크리스찬 문학 5집)

윤동주는 25세(1942년)에 도일해 대학에 다니다, 다음 해 7월에 귀향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으며, 그는 자신이 쓴 8장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하나,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5촌 당숙 윤영춘이 확인한 그의 수감기록에 의하면 ‘사상불온’‘독립운동’‘비일본신민’‘온건하나 서구사상이 농후’하다는 죄목이 있었다 한다. 죄목은 일제 경찰의 탄압적 수법에 흔히 쓰인 일반적 의미로 해석된다.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는 해방을 반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를 감옥에서 마쳤다.
윤동주의 생애는 극히 짧았다. 그러나 그가 시를 쓴 기간은 현존 작품만을 보더라도 상당한 지속성을 보여주며, 더욱이 17세부터 25세에 이르는 성숙기에 걸쳐 있기 때문에 단순치 않은 변모의 흐름을 지니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리 손에 남은 또 하나의 작품 ‘서시’에서 운동주는 삶의 괴로움에 대처한 순수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그와 우리를 연결하는 ‘세계의 어둠’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우리의 얼굴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20세를 전후하여 근 10년간에 전개된 그의 체험과 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급격한 변화 및 갈등의 양상을 보인다.

초기시의 암울한 분위기, 동시(童詩)에 깃든 유년적 평화에의 지향, 다시 맞게 되는 방황과 어두운 세계상, 자아의 분열과 긴장, 부적응---이렇게 서로 인과하고 혹은 반발하는 주제의 흐름을 우리는 보았다.

이러한 시적 편력의 배후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체험적 원천이 자리 잡고 있다. 그 하나는 조국을 잃음으로써 역사적·사회적 삶의 자리를 박탈당한‘민족적 어둠’이다. 두‘어둠’이‘윤동주’라는 하나의 정신 속에 결합하는 데서 그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

‘뿌리 뽑혀진’영혼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눈을 통한 화해로운 세계, 고뇌에 찬 성인에게 인식된 갈등의 세계 --- 이 대립된 지향은 결국 ‘자기정립에의 노력’이라는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다. 윤동주의 시정신은 이러한 대립적 과정을 극복하면서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해온 것이다.

문학의 가치는 시대성과 보편성 중 어디에 있는가? 윤동주의 시가 항구적인 저항시 이기에 가치 있는 것은 아니며, 빼어난 서정성이나 미적 특질을 가져서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윤동주 시의 가치는 그가 ‘시대의 고뇌와 개인적 번민이 통일된 육체로 느끼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온다.
그는 자기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고, 동시에 특정한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연결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에 도달하였다.

그의 성공적인 작품들은 이러한 바탕에 섰거나 접근한 것들이다. 이 일체화의 노력이야말로 훌륭한 문학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식’이며, 문학을 존재하게 하는 정신이다.

작품에서 윤동주는 단순한 개인적 체험을 넘어, 깊은 통찰력으로 시대의 아픔을 자기화한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소중한 일장이며, 또한 근대 정신사의 뼈아픈 대목이다.

그는 환상적인 평화에 안주함도, 어둠 속에 방황함도 보람 없는 일임을 느꼈고, 마침내 고통스런 현실과 맞서서 유혹과 억압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할 것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윤동주는 우리 곁을 떠나간지 오래된 시인이지만, 그가 남긴 저항은 4·19혁명, 5·18광주 민주화운동과 함께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저 역사의 현장을 앞장서서 걷던 시인, 그 저항의 목소리로 하늘과 바람과 시의 진실을 이야기했던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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